『이달의 열사』가 잘 드러나지 않은 노동열사를 찾아 그 정신을 알리자는 처음 기획 의도와는 달리 이미 알려진 열사들의 자료 중심으로 정리되고 있다는 지적을 받고 열사 선정에 고민을 하게 되었고, 새로운 자료들과 증언을 찾아야 한다는 부담을 갖고 8월의 열사를 선정하게 되었다.
김주리 열사를 선정하고 자료가 너무 없어, 수소문 끝에 같이 활동하던 열사의 선배를 만나 ‘김주리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최명아(98년 2월 24일 민주노총 조직부장으로 활동하다가 정리해고제 합의 파동 당시 과로에 의한 뇌출혈로 쓰러져 순직함)일 것’이라는 말을 듣고도 오래 전에 읽은 최명아 동지의 추모집 『사라지는 것은 없다』(1998)에 고인의 일기에 기록된 ‘주리’가 동일인물이란 생각은 하지 못했다. 최명아는 김주리를 회고하며 이렇게 썼다.
처음에는 나 때문에 죽었다는 자책감에 그 아이를 떠올리지 않으려 애썼다. 내가 괴롭고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름처럼 제가 가진 것을 몽땅 주고 간 아이. 나를 만나지 않았다면…(『사라지는 것은 없다』, 13쪽)
김주리 열사는 1964년 2월생으로 전남 목포에서 2녀 1남의 장녀로 태어났다. 그러나 목포는 태어난 곳일 뿐 서울에서 초.중.고교를 다니고, 1982년 이화여대 정외과에 입학한다. 아버님이 방송국 일을 하셔서 집안은 부유한 편이었고, 맥가이버와 박남정, 이승철을 좋아했던 모나지 않은 꿈 많던 소녀였지만, ‘80년대 초반의 상황이 개인적으로 안주하게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최명아 동지의 일기에도 나오지만, 최명아 동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았을지도 모를 김주리는 대학 입학 후 1년 선배였던 최명아를 만난다. 같이 학회 활동을 하고 자신이 해야 할 실천을 고민하며 학창 시절을 보낸다.
학교를 졸업하고 김주리는 여성운동에 관심을 갖고 여성신문사에 들어간다. 제도권 정당으로부터 여성위원장을 제안 받기도 했으나 여성운동에 한계를 느끼고 계급적 실천운동을 위해 인천으로 간다. 거기서 잠깐 운동권들이 만든 ‘변혁시대’라는 출판사에 있었으나, 최명아의 소개로 만난 봉제공장 해고자였던 이미혜(93년 인천민주노동청년회 회장을 역임함)에게 봉제기술을 배우며 현장 활동에 대한 준비를 한다.
열사는 89년부터 노동자 200명 규모의 우진상사에서 B급 미싱사로 일하게 되었고, 집을 이사하게 되어 옮기게 된 진영물상에서 일할 때는 이미혜, 이미옥(원풍해고자)과 같이 생활하며 공장 일을 하였다. 이 당시 약 15만 원 정도의 급여를 타면 맏언니였던 이미혜에게 모두 맡겨 용돈만 분배받고 활동을 위해 모으며, 12시간의 노동을 견뎌냈다.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1991년 열사는 위장취업자로 해고를 당한다. 해고 후 복직 투쟁을 전개하며 잠시 집에서 쉬기도 했지만, 다시 인천으로 와서 92년에 동지들과 미모사(미인들이 모인 회사)를 만든다. 5명(김주리, 이미혜, 원풍해고자 3인)이 모여 만든 미모사는 해고 미싱사를 위한 집으로, 사양화된 섬유산업의 새로운 조직 모델로 만든 것이다. 미모사는 지하 5평 규모로 미싱 4대로 부속품을 만드는 하청 일을 했다.
술은 한잔도 못하지만, 담배는 조금 했던 열사는 가장 먼저 나와 일하기 전 담배 한 대를 피우려다가, 그날 날씨가 안개가 끼고, 습도가 높아 지하실 공기가 빠져나가지 못해 고여 있던 가스(같이 일하던 사람의 남편이 포장마차를 운영하다가 망해서 가져다 놓은 가스통)가 폭발하여 화상을 입고 혼자 택시를 타고 부평안병원(현재 세림병원)으로 갔다가 한강성심병원으로 이송된다.
한 달 가까운 투병 생활 끝에 93년 8월 7일 의사에게 손가락으로 안락사를 그리며, 8월 8일 운명했다. 장례식은 인천 지역의 활동하던 동지들과 노제를 지내고 화장을 하였으며 부모님이 손톱과 머리카락, 유골을 가져가셔서 구파발의 집에 안치하셨다.
조용하고 환한 얼굴로 꾸밈이 없던 사람이었다는 열사는 커피를 즐기고 혼자 등산과 여행을 좋아하며 사색을 즐긴 도인 같은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항상 힘든 내색하지 않고 평등세상을 위해 헌신했던 사람. 부유한 가정 형편과 달리 몸에 배인 검소함은 자신에게 엄격한 활동가의 모습을 보여 주었고, 자기는 쓰지 않고 아낀 돈을 어려움에 처한 동지에게 아낌없이 주며, 명절에는 집에서 냉장고를 다 털어와 나눠주는 모습은 이름처럼 모두 주고 간 영원한 동지이다.
열사가 중환자실에서도 불러 달라던 노동가요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은 아마도 힘든 동지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힘을 주던 김주리 열사의 미소가 의미하는 실천적 모습이 함축적으로 표현되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