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당신은 즐기지만 나는 소망한다

강현만 2021. 9. 22. 17:26
- 당신은 즐기지만 나는 소망한다.(볼테르와 루소의 편지에서) -


1755년 18세기 포르투갈의 리스본은 부자와 빈자, 귀족과 평민, 왕권과 신권이 유럽에서 가장 첨예했던 곳이었다. 18세기 포르투갈의 리스본은 거대한 식민지로 막대한 부를 쌓았지만 지배계급의 것이었다. 평민들은 가난했고 빈민 밀집지역에 모여 부대끼며 살았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를 외치는 종교의 기만과 이중성은 일상이었다. 이는 지배계급이 쉽게 사용하는 통치술의 풍경이다. 지배계급의 죄를 희석시키고 일반화함으로써 지배 사슬을 지속하려는 아주 손쉬운 기만책이다.

인류가 이루지 못했던 평등을 자연재앙은 한순간에 달성했다. 자연이 준 교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실천하지 못하면 결국은 다시금 구체제의 지배계급은 회귀하고 만다.

카르발류는 많은 과감한 정책과 실행을 통해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신분제도와 인종편견을 불식하고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평민들을 교육시켜 새로운 인재, 신지식인으로 만들 생각을 했다. 포르투갈의 소외 계층, 상인과 무역업자, 자유사상가, 군인, 소작농들은 모두 그를 지지했다. 그러나 카르발류는 결국 쫓겨나 귀양지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이했다.

자유와 지식을 맛본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그전의 세상으로 돌아 갈 수 있다. 지배의 총칼에 목숨으로 맞서는 일은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지배에 맞서 끊임없이 각성하고 투쟁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언제든 뒤로 회귀할 수 있다. 왕과 귀족, 성직자, 자본과 권력 그에 빌붙어 있는 온갖 쁘띠부르조아지는 언제든 카르발류를 위시한 피지배계급에 총칼을 들이댈 수 있다.

지배계급은 스스로 부와 권력을 내놓지 않는다. 착취와 억압이라는 계급사회가 발생한 이래로 지배와 피지배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있다면 지배계급의 지배강화를 위한 다양한 탈의 가면이다. 서양종교개혁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루터는 기층민중이 들고 일어섰을 때 기층민중의 투쟁과 저항에서 이탈했다. 오히려 탄압하는 자로 변했다.

홍익인간 인내천의 정신은 만인평등의 사상이다. 지난 촛불혁명은 대한민국의 주인이 국민이요, 권력의 요체가 국민임을 확인하는 장이었다. 다양한 외국의 사례와 역사는 내가 살고 있는 현실에 비춰볼 때 내 것으로 작용할 수 있다. 내가 살고 있는 현재의 토양위에서 끊임없이 묻고 답하지 않는다면 유희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

인류가 살아온 시대의 양식에 비춰 우리는 노예요, 농노요, 노동자의 위치에 놓여 있다. 인류는 평등한 세상을 염원했다. 평등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해 온 역사다. 이 과정에 셀 수 없는 사람들의 생명과 피가 대지에 적셔 있다. 지금 우리가 누리는 자유와 민주는 그 연장선이다.

지배계급을 대변하는 부와 권력의 대변자(세력)를 쫓아서 이리저리 휩쓸리고 환호하는 것은 주인으로서 지위와 역할을 다하고자 하는 직접민주주의 시대정신과 거리가 멀다. 주민자치, 민회 등 직접민주주의는 처음과 과정, 끝에 대해 자기 결정권을 갖는 것이라 할 것이다.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면 다 된다는 구호는 이제 낡은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가 되었다. 소수 누군가가 잘 먹고 잘 살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네가, 우리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기획하고 논의하고 결정해야 한다. 삶과 정치의 주인임을 선언하고 스스로 통치하는 직접민주주의 시대가 펼쳐져야 한다.

당신이 즐기든 소망하든 그것은 자유다. 중요한 것은 지배계급의 사슬을 끊는 역사의식과 실천이다. 사람이 하늘이고 하늘인 사람을 지배하고 구속하는 모든 사슬을 끊어내는 것이다. 그것도 내 일상의 삶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