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림
희로애락, 살아가는 과정에 만나게 되는 알림의 장면이 있다. 그 알림조차 조심스럽거나 민폐가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부담을 갖기도 한다. 다양한 모습을 띠지만, 위로와 공감에 물질이 따라붙기 때문이다.
나는 아주 예외가 아닌 다음에야 무조건 알리자는 쪽이다. 당사자가 알리는 것도 있겠지만 주변에서 알리는데 협조를 해줘야 한다. 나는 이 부분에 적극적인 편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선에서 최대한 알린다.
‘어떻게 하고는 본인이 알아서 할 일이고, 인연이 있는 사이라면 알고는 있어야지요’
인연이 있다면 적은 정성이나마 도리를 다하려고 애쓰고 있다. 직접적인 인연이 없는 전혀 다른 시공간이라도 그 고통에 아파하고 사랑을 나눌 수 있을 때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고 인생이 어디 마음먹는다고 다 되던가? 사노라면 통장에 바닥이 비칠 때가 있다. 얼굴을 들기가 어렵고, 쥐구멍을 찾고 싶어진다. 나는 대놓고 가난뱅이라고 선언하는 두꺼움을 가지고 있지만, 도리를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난처하고 난감한 장면은 피치 못할 부끄러움으로 남게 된다. 글을 쓰면서 새삼 죄송함을 전하고 싶다.
경황도 없고 정신 차리기도 쉽지 않았다. 아버지 부고를 알려야 한다. 일목요연하게 미리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알리는 것은 쉽지 않았다. 카톡방, 밴드, 페이스북 등 단체로 알리는 곳이 편하다. 개별적으로 보내야 하는데 보내다 보면 헷갈려서 제자리걸음이었다. 그렇게 경황이 없는 중에도 사람들은 마음과 정성을 보내주었다. 고마움이 크다. 부고가 전해지지 않은 분은 이 자리를 빌려 송구한 마음을 전한다.
하늘의 선녀가 바위에 놓고 간 옷이 닳고 닳아서 ‘인연’이 맺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모양에 대해 생각하고 갈고닦는 노력은 죽는 순간까지 일 것이다. 가벼이 스치는 찬바람에도 주변을 돌아보는 기운으로 따스하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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