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스크랩] 85년 10월 IMF,IBRD 반대투쟁

강현만 2012. 4. 26. 03:10

기억이 가물해지는 세월이다.

특히나 내 경우는 내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에 대해서는 기억을 잘하지 못하는 경향도 있는 듯 싶다.

가끔은 집사람에게도 핀잔을 듣는다. 어쩌면 그것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냐고 말이다.

근데 그게 기억이 없는 걸 어쩌란 말인가?

 

얼마전 우리 동문들과 이야기에서도 나는 왜 그리 기억이 잘나질 않는지 모르겠다.

85영도가 총학생장을 했다는데 기억이 나질 않는 것이다. 이런 내 모습에 한용이는 더 벙쩌하는 것 같다.

이야기를 하다보니 어렴풋하게 기억이 나기도 하는 것 같은데 그러면 그때 나는 총학생회에서 어떤 역할이나 일을 했는지

기억이 또 선명하지가 않다.

ㅋㅋ 이러니 이제 나도 그러려니 하고 싶어진다.

 

그런 이야기들 속에서 우리가 살았던 80년 장신대, 교회 등 다양한 모양의 운동이야기를 단편씩이나마 기록해두는 게 의미가 있겠다 싶어졌다. 각자가 기억을 더듬어 적어 놓고하면 퍼즐맞추기 식으로 맞추어지는 그 시대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85년 10월이면 나는 여전히 기독학생운동(교회대학생부운동) 공간에 많은 부분을 함께하고 있었다. 물론 85년이 되면서 학교쪽

83지일, 주현선배 등이 기독학생운동이 아닌 학생운동으로서 장신대 운동의 필요성을 설파하고, 그 연장선상에서 84들을 학교 학생운동으로 중심을 세우기 노력하던 때이기도 하다.

 

85년은 83년 말부터 시작되었던 전두환정권의 유화국면으로 인해서 대학가 투쟁이 왕성하게 전개되던 시기다. 특히나 4월 신림사거리에서 '전방입소 전면거부 및 한반도 미제 핵기지화 결사 저지',  '양키의 용병교육 전방입소 결사반대', '반전반핵 양키고홈'을 외치며 숨져간 김세진, 이재호열사 투쟁 등은 학생들로 하여금 결의와 헌신의 투쟁감을 고취하게 했다.

 

나는 학교에서 '인간사상연구회' 써클을 통해서 사회인문학의 이해와 깊이를 쌓아갔다. 선배들과 소설, 해방신학 등 다양한 주제로 토론하는 과정이었으며 그러한 과정들은 자연스럽게 전두환군사독재에 맞서 싸워가는 운동권학생으로의 과정이었다. 이 과정에 더욱 충실하게 만든 건 교회기독학생운동영역이었다.

내가 다니던 교회는 대한민국 부자들이 모여 산다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내 현대교회였다.

교회 대학부에는 다양한 학교의 출신들이 섞여 있었다. 84의 경우는 성심여대, 서울대, 장신대 등이 있었고, 83,82의 경우는 이외에도 이대, 서울교대 등으로 구성이 다양했다.  

 

85년 서울에서 열린 IMF,IBRD총회는 전두환군사독재를 미화시키고 국제적으로 인정하는 장으로 작용하는 지점과 국제통화기금, 세계은행의 축으로서 국제부흥개발은행이 한국경제를 종속시키는 장으로 작용하는데 대해 분면하게 선을 긋고 대중적으로 반대투쟁을 해야 한다는 목표아래 대학가에서 다양한 반대투쟁을 전개했다.

교회기독학생쪽에서도 디데이를 정하고 청량리에서 반대가두투쟁을 전개했다. 동의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와 소리를 지르며 순식간에 현수막이 펼쳐지고 대오를 형성한 투쟁대오는 차량을 막고 앞으로 전진하며 구호를 외쳤다. 주동으로 뜬 선배는 태극기를 몸에 두르고 태극기를 휘두르며 맨앞에서 대오를 이끌었다.

어떻게 알았는지 금새 경찰들이 몰려 온다. 맨 앞에 있던 나는 대오가 해산된 줄도 모르고 있다가 잡혀가게 되었다. 구류 10일을 살았는데 학교는 중간고사 기간이었다. 시험을 못보게 된 것이다.

열흘만에 나온 나는 열렬한 환영의 술자리를 맞았다.84성재가 구의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던 때였는데, 83,84가 성재방에 몽땅 모였다. 이쿵저쿵 이야기들이 넘쳤고 그만큼 술도 넘쳤다. 이 때 84들이 꽤나 많이 있었다. 만영이, 성재, 휘수, 현태, 사무엘, 애경, 영철이 등

겁없이 싸웠던 청량리IMF반대 투쟁이었다. 그렇게 나는 열렬한 운동권이 되어 갔다.

출처 : 광나루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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