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독서

변신 - 프란츠 카프카, 문학동네

강현만 2014. 9. 14. 18:20

  변신 - 프란츠 카프카, 문학동네

 

  어느 날 아침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개어났을 때 그는 침대 속에서 한 마리의 흉측한 갑충으로 변해 있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했다. <변신> 소설의 시작이다. 소설은 계속해서 변해있는 갑충의 모양새를 관조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나라면 어땠을까? 당혹스럽고 놀랍고 슬프고 분노스럽고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라서 우왕좌왕 했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통상적인 상례가 아닐까? <변신>은 시작부터 우리네 통상적 감성을 멀리하고 있다.

  사람이 하루 아침에 갑충으로 변신했다. 갑충은 출근을 생각한다. 출근할 시간에도 나타나지 않는 그레고르에 대해 누이, 엄마, 아빠의 걱정과 재촉이 이어진다. 출장 영업사원인 갑충(그레고르)은 지금 껏 가족의 경제를 담당하는 일 벌레로 역할을 했다. 회사 지배인이 끝내 그레고르를 찾아 방문하고 변신한 갑충의 그레고르를 보게 된다. 놀라움과 두려움의 그레고르는 가족들로부터 차단된 채 하루하루를 살아 간다. 누이가 가져다주던 음식도 차츰 먹지 못하는 상태로 빠지게 되고, 아버지의 사과폭탄에 변신한 그레고르는 등짝에 심각한 부상을 입기도 한다. 끈적끈적 흔적을 남기며 이동하는 갑충은 누이의 바이올린 소리에 감동하고 동물이 음악에 감동할 수 있냐고 외친다. 변신해버린 그레고르, 갑충은 이제 가족들로부터 더 이상의 연민보다는 치워버려야 할 가족의 애물단지로 전락한다. 그렇게 갑충은 납작하게 말라 비틀어진 채 죽게 되고, 갑충은 가정부아주머니에 의해 가볍게 처리된다. 가족은 그레고르가 일하지 않는 사이에 살아남기 위해 각자 일자리를 구했고, 근심거리가 처리된 해방된 느낌으로 기차를 타고 야외로 소풍을 나간다. '이제는 슬슬 딸에게 착실한 신랑감도 구해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고 생각했다. 목적지에 이르자 딸이 제일 먼저 일어나 젊은 몸을 쭉펴며 기지개를 켰을 때, 그들에게는 그 모습이 그들의 새로운 꿈과 아름다운 계획의 보증처럼 여겨졌다.' 소설 끝 문장은 건강과 생기, 새로운 꿈과 계획으로 빛나고 있다.

 

  사람사는 세상에 최소한의 상식조차 숨쉬기 어려운 짐승의 시대가 흐르고 있다. 어쩌면 인간은 이미 변신의 그레고르 갑충보다 못한 피나 빨아대는 배불러 곧 터질 것 같은 모기에 질식되어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을 읽는 중간중간에 갑충으로 변해 있을 모습이 상상되어 몸은 오글거리고 신경은 예리하게 무언가에 찍혀 있는 것 같았다. 감각적으로 느껴지는 소름은 어쩌면 자본주의 탐욕으로 짓눌리고 비껴 서 있는 우리네 모습이다. 자본과 권력의 탐욕으로부터 언제 벗어 날지 모르는 노예로부터 벗어나길 바라는 노력의 한 과정으로부터 변신한 갑충일 수 있다. 그렇게 모질게 노력해서 변신한 갑충은 새롭게 해방을 만들거나 찾아 내지 못한다. 다만, 죽어서까지 또 다른 식구의 삶의 터전으로 되는데 만족할 수 있다.

  좁게는 장애인 가족을 둔 경우가 소설과 평면적으로 비슷할 수도 있지 않을까? 특히나 정신지체장애인 또는 치매환자를 둔 가정의 경우는 도무지 가족이 담보하고 해결하기에는 너무도 어렵다. 공동체의 몫이고 국가의 몫인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우리는 가족에게 맡겨 놓고 있다. 정신지체장애인을 수용하는 기관(대부분 종교시설)의 기관장은 하나님 행세를 하고 있다. 마치 장애인을 둔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하인이나 종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 

  세월호에 겹쳐 있는 일베충류, 청와대나 새누리당, 그 이중대들은 그레고르 갑충을 어떻게 비춰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