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독서

글쓰기의 모험(황산 지음)

강현만 2021. 3. 7. 23:03

1장

자신의 삶을 담아 쓰라 – 니체와 함께 떠나는 글쓰기의 모험

 

“네 운명을 사랑하라!”

“일체의 글 가운데서 나는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쓰려면 피로 써라. 그러면 너는 피가 곧 넋임을 알게 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게으름을 피워가며 책을 뒤척거리는 자들을 미원한다.”

저자는 ‘피로 쓴다’는 것에 대해 ‘삶의 체험’이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한다. 체험이 담기고 자신의 넋을 담은 글이어야 살아 있는 글이 된다.

 

니체는 ‘망치질 하는 철학자’로 일컬어진다. 니체는 해묵은 관습과 전통을 뒤집는 글쓰기 방식을 시도했다.

 

아포리즘의 빛나는 보석들

니체는 시인이다. 대표적인 작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는 특이한 양식으로 쓰인 산문시이다. 이 작품은 시의 장르이지만 여행기로서 서사구조, 산문시이면서 소설적 서사를 지니고 있으므로 딱히 하나의 장르로 구분하기 곤란하다. 전혀 새롭고 낯선 방식의 철학적 글쓰기다. ‘아포리즘적 글쓰기’이다. “피와 잠언으로 글을 쓰는 사람은 그저 읽히기를 바라지 않고 암송되기를 바란다.”

 

스타일을 넘나드는 자유와 리듬

니체는 여러 문학적 장르와 스타일으 철학적 글쓰기에 과감하게 도입하였다. 낯설고 특이한 글쓰기, 상식과 전통을 벗어난 문체와 구성은 독자들의 가슴에 기억 속에 오래 새겨지기 때문이다.

넘치는 ‘자유의지’로 어떤 모험도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다. 자유정신과 에너지 그리고 리듬과 섬세함이다.

니체는 철학과 수사학을 뒤집었다. 수사학은 사유와 언어의 본질이다. 니체의 글은 수사학의 향연이요, 수사학적 쓰기의 천재다. 수사학 하기는 철학하기이며, 철학적 사유는 수사학적 사유와 글쓰기이다.

 

글은 장인이 빚어내는 작품

천재성이나 위대한 작품은 ‘수공업적 성실성의 결과’라는 것이다. “모든 위인은 착안에서 뿐만 아니라 버리는데 있어서도, 또 가려내거나 수정하거나 정리하는 데 있어서도 지칠 줄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인 것이다.” 대다수의 예술적인 창조 작업은 그야말로 수공업적 작업이다. 지금까지 투입하였던 에너지와 땀의 결정체일 뿐이다.

지금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순간은 위대하고 아름답다. 그로부터 기적이 만들어진다.

 

온몸으로 쓰는 글쓰기의 황홀

니체는 디오니소스적 인간이다. 포도주와 풍요, 황홀경의 신이다. ‘글신’이 찾아와야 한다. ‘시마’의 체험, ‘영감’이라고도 하는 ‘몰입 상태의 경지’에 빠진다. 광기에 가까운 어떤 상태에 글쓰기는 써야만 한다.

 

글쓰기는 넋이 담긴 자기 삶의 고백

모든 글은 글을 쓰는 나에게서 비롯된다. 베껴 쓰고 모방하는 글은 ‘자아의 글쓰기’가 아니다. 글쓰기란 자기 고백이다. ‘삶의 지문’이 있다. 글은 자기 삶의 흔적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글을 쓴다.

니체에 따르면 미래의 철학자들은 ‘시도하는 자’ 즉 ‘실험하는 자’이다.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고, 자신을 둘러싼 온갖 경계를 넘어서며, 언제나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감행하는 자이다. 모든 글쓰기는 모험이며 모든 작가는 모험가들이다.

 

▶ 칼릴 지브란의 작품 <절반의 생>에서 말하는 전체적인 삶, 온몸을 던지는 삶, 마음과 몸의 에너지를 다하여 살아내는 삶으로서 글쓰기도 마찬가지다. 무얼 위해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누가 이렇게 전체를 살고 글을 쓰는가? 절반의 절반, 1/100이면 어떤가?

▶ 삶의 지문으로서 좋은 글이다. 삶과 글이 따로 노는 자들에 글은 글쓰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2장

 

글 속으로 표류하라

 

“쓰다. 내 삶을 채운, 그리고 내 삶을 매혹시킨 유일한 것. 나는 그것을 했다. 쓰기는 단 한순간도 나를 떠나지 않았다.”

프랑스 소설가 마르크리트 뒤라스는 글쓰기에 대해 말했다. 그녀는 고독에 대해 강조하였다.

모리스 블랑쇼 역시 고독과 은거를 택한 작가이다. 자크 데리다는 추도사에서 “어떻게 바로 여기서, 이 순간, 이 이름 모리스 블랑쇼를 부르는 순가, 떨지 않을 수가 있단 말입니까?”

 

바깥의 경험, 문학의 출처

블랑쇼의 주제는 ‘바깥’이다. 그의 사유를 ‘바깥의 사유’ 혹은 ‘외부의 사유’라고 칭한다. 바깥은 안이 아니다. 삶의 추방, 익숙한 것으로부터 추방, 자기 존재의 바닥을 잃어버린 자의 경험이다. 바깥은 추방당함의 경험이다. 불행의 경험, 고통의 경험이다. 자신의 삶이 뒤집히는 경험으로부터 새로운 글쓰기, 진정한 글쓰기의 토대가 된다. 가난과 고독의 길을 걸으며 정신의 자유를 선택한 스피노자의 추방의 경험. 글쓰기는 경계 지점에 자리하고 있다.

 

고통의 심연에서 솟구치는 글

더 이상 어찌할 수도 없고 달리 할 것도 없는 절망, 그 어디로소 향할 데가 없고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된 절망, 모든 출구가 막혀 유폐된 골방에서 펜촉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의 상황, 사랑에 빠졌을 때, 지독한 가난일 때 글이 흘러나온다고 한다 작가는.

쓰기는 ‘죽기’이자 ‘살기’이며, ‘죽음’이자 ‘생산’이다. 통제할 수 없는 광기. 글쓰기는 비명, 탈출, 울음, 웃음, 출구이자 입구이다. “쓰는 것으로 버티었어요.” “쓰지 않으면 미칠 것 같기 때문에 쓴다.” 글쓰기는 바깥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동요에 자신을 내맡기기

바깥의 경험은 재난에 직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재난은 “주체의 지워짐, 주체의 소진”를 초래한다. 불안정성과 동요에 글쓰기 자체를 내맡기는 것. 글쓰기의 변화를 긍정하고 표류하는 것. 있는 그대로.

 

‘나’에게서 ‘그’로 이행하는 해방

글쓰기는 글, 즉 텍스트를 만든다. 문학이란 ‘나’라는 주체 대신 ‘그’라는 주어를 사용하는 글쓰기이며, ‘그’라는 화자가 말하게 하며, 객관적이며, 중성적이게 한다. 타자이자 제3의 인물이 된다.

블랑쇼에 따르면 가장 아름다운 글쓰기는 자신을 배신하는 글쓰기이다. 작가의 죽음이다. 블랑쇼는 글을 통해 자신을 돋보이려 하지 말고 그냥 조용히 사라지라고 말한다. ‘작가의 사라짐’, 작가의 부재를 선언하는 마음은 자신을 비우는 마음이다. 자아의 사라짐.

 

▶ 고통의 심연에서 솟구치는 글이 아니라 돈과 명예에 솟구치는(집착) 글은 남한사회, 지금 시대의 모습인가? ‘빠’의 단계를 지나서 ‘좀비’로 나타나고 있는 작가와 글의 현상은 무엇인가?

▶ 영혼이 정갈하고 시대와 인민에 배신하지 않는 글쓰기는 불가능한 것인가? 돈과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글쓰기는 사치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