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총선을 바라보는 시민들은 참으로 곤란하고 무기력할 것이다. 나도 얼마 전까지 그랬으므로. 우울하고 무기력한 심정이 정리된 건 얼마 전이었다. 다소 역설적이지만 우울이 끝 모르게 깊어지다가, 녹색정의당 외에 의탁할 곳이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졌다.
이번 민주당의 공천이 얼마나 억지스러웠는지 굳이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민주당을 지지하지도 않는 내가 그 공천학살을 보며 고통스러웠던 가장 큰 이유는 무엇보다 젠더가 조용히 지워졌다는 점이다. 더불어민주연합에서 내쳐진 후보들의 면면을 보면서도 마찬가지였다. 병역거부와 퀴어, 국가보안법이 공천 취소의 사유가 된다는 것은 곧 그 사유들이 공적인 영역에서 자신을 드러내는데 작용하는 ‘차별적 기준’이라는 걸 의미한다.
정신 없이 일 하느라 넘어갔지만, 나는 과거 개혁신당에서 장애운동가인 배복주 후보가 겪었던 차별과 모욕도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 당인 줄 모르고 갔느냐는 말들에 담긴 냉소가 오히려 문제라고 생각했는데, 그 냉소는 어떤 정당에 있다는 이유로 더 차별받을 수 있다는 논리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가 적어도 민주공화국이라면, 더 차별받아도 되는 상황과 조건이란 건 존재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더불어민주연합의 공천이 내겐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더 우울했던 것은 연합정치시민회의의 몇몇 원로들이 정당한 절차나 의견 수렴도 없이 독단적으로 ‘바람잡이’ 역할을 하며 비례위성정당 참여의 길을 열었고, 그 길을 진보당이 힘차게 뒤따라 걸었다는 사실이다. 그외에도 개혁신당이나 새로운미래 같은 정당들에 참여한 정의당 출신 및 시민사회 인사들을 보면서도 우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더욱이 그 모든 것들을 뒤엎고 조국혁신당이 바람몰이를 하면서, 계급과 젠더가 정치의 의제와 가치로 등장하는 걸 불가능하게 만드는, 진보라는 자의식으로 뭉친 그 엘리트 집단들의 말들이 나를 고통스럽게 만들었다.
역설적이게도 이쯤되면 명확해지는 것이다. 녹색정의당 말고 내가 의탁할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을. 현재의 정치체제가 자신을 대변할 수 없다고 직감하는 사람들, 계급도 젠더도 실종된 현재의 정치가 문제라고 느끼는 시민들에게 녹색정의당은 분명한 대안이다. 이것이 명확해지자 나는 더 이상 우울하지 않게 되었다. 그간의 녹색정의당이 얼마나 부족했던 간에 의지할 곳이 여기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주저하고 갈지자를 보이면서도 길게 보면 녹색정의당이 독자적인 진보정당의 노선을 걸어왔음을 안다. 부족하더라도 계급에 대해 젠더에 대해 말하고 부당하고 억울한 일을 감내해 온 시민들의 곁에 서고자 했음을 안다. 그런 의미에서 너덜너덜하고 어딘가 멍든 기분이 들지언정, 녹색정의당이 체현하는 진보정당의 역사에 충분히 자랑스러워 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다.
완벽한 개인도 조직도 없는 법이고, 적어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선거레이스를 끝까지 밀고 나갈 긍지와 자부심이다. 더욱이 익명의 국민들, 아니 익명의 국민을 자처하지만 실은 민주진보연합이라는 구태의 유산에 사로잡힌 일부의 시민들을 향해 사죄를 밝힐 필요도 없다. 선거철마다 정의당의 비호감도가 올라갔다면, 그것은 어떻게든 진보정당을 굴복시켜서 제 뜻대로 하려는 이들이 혓바닥을 놀린 탓이 적지 않다. 그들의 프로파간다를 우리의 거울로 삼을 수는 없는 법이다. 오히려 우리가 미안하고 죄스러워 해야 하는 대상이 있다면, 우리가 아무리 사과를 밝혀도 그 언어가 닿지 않을, 우리가 그 곁에 있어야 했으나 그러지 못했던 힘 없고 목소리 없는 시민들이어야 할 것이다.
한국사회는 가진 것 없는 사람들, 힘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고 멸시하는 데 익숙하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모를 두었고 그런 이웃을 두었으며 그런 친구들을 두었다. 내 성장의 기반이 바로 그들이었고, 나는 그들이 생의 풍파를 견뎌내며 간직한 ‘현명함'을 보며 자랐다. 어쩔 때는 억척스럽고 약삭빠르다 느낄 정도로, 자신에게 진정 무엇이 이득이며 무엇이 필요한지 본능적으로 알아채는 현명함이 있다. 그리고 그 현명함은 넉넉함으로도 이어진다. 가진 것이 별로 없지만 조금이라도 이웃과 나누면서 함께 풍파를 맞을 때 좀 더 삶이 견딜만해진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나는 그 현명함과 넉넉함을 신뢰한다. 없는 사람들, 차별과 혐오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 지닌 그 훌륭한 덕목이, 이번 총선에서 녹색정의당을 선택하는 근거가 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덧. 나는 노동당이 진보정당의 일원이라 믿는다. 체제전환 운동을 만들어가는 시민사회의 흐름 역시 무척 소중하며 새로이 진보정당을 재건하는 길에 함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작지만 품이 넓은 ‘대안 세력’은 분명 존재한다. 당장은 총선이 코 앞이지만, 총선 이후 진보정당과 시민사회 내에서의 평가와 논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다시 새로운 진보정당과 사회운동 세력을 형성해가기를 기대한다. 나도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을 고민할 생각이다.
페북 최성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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