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라는 말과 글은 가슴 울렁이고, 감동이었으며, 무언의 신비로움과 존경의 대상이다.
하느님의 종으로 선한 일꾼으로 살겠다고 찾아간 신학대학에서 내가 운동권 학생이 된 것은
너무도 자연스럽고 당연한 귀결이라 생각된다.
신학대학을 가기로 결심하고 조언을 듣기 위해 만난 신학대 선배로부터 신학을 공부하는데 괜찮은 동아리로 추천한 써클이 '인간사상연구회'였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이 끝나고 곧바로 찾아간 '인간사상연구회'는 시골 선배로부터 들었던 순수학문을 공부하는 곳에서 조금씩 벗어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대학 1학년 신학과 동기들... 맨 오른쪽이 나다.
시골선배가 이야기했던 것과는 다르게 연구회는 김재엽이라는 선배를 통해서 성격이 바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운동권 학습 또는 사상 연구회로 바뀌어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이 선배가 82년 원풍모방 사건으로 징역을 살고 나오게 되면서 이 써클의 색채가 조금씩 바뀌는
상황이었는데 그때 나는'인간사상연구회'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인간사상을 토론하고 연구했다. 쟁쟁한 선배들 틈에서 나는 별로 말할 것도 없었다.
책 한 권을 가지고 토론을 하면 어찌나 예리하고 논리정연하게 자기 주장들을 펼치는지 대학 새내기인
나로서는 뾰쪽한 말빨을 세울 수가 없었다. 지난 세월 12년의 교육을 받았지만 그 교육이라는 게
그야 말로 바보들의 행진마냥 외우고 풀고 맞추기에 급급한 상황이었으니 처음 접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토론, 세미나라는 게 쉽지 않은 과정인 것은 당연했다.
이렇게 시작된 나의 인간사상연구회는 그 연장선상에서 학생운동을 하는 교회대학부를 만나게 되었고
초기 운동권 학생으로서 본격적인 학습과 실천은 강남구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단지내 상가에 있었던
'현대교회'에서 진행되었다.
1, 2학년을 거치는 동안 학교와 교회에서 정말 열심히 학습하고 실천하는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초기 입문단계에서 소설 등 교양서적에서부터 근현대사, 자본주의 관련 경제학습, 변증법적 유물론 등 철학,
혁명사, 구성체 논쟁 등. 그 학습의 귀결점은 '자본주의', '자본가와 노동자', '혁명주체로서 노동자'였다.
학교는 선배였지만 운동은 후배였던 총학생장이 장가를 갔다. 당시 나는 학내 운동조직의 대표였다.
대성리 MT에서...
88년, 집사람과 나는 숨길 필요가 없게 된 공인된 커플이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노예주에 맞서 노예가 해방투쟁을 전개한 노예제 사회, 봉건영주에 맞서 농노해방
투쟁을 전개한 봉건제 사회, 그리고 자본가계급에 맞서 노동해방투쟁을 전개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
였다.
자본주의 사회로서 대한민국을 궁극적으로 해방 시킬 수 있는 존재는 '노동자'였던 것이다. 세상의 모든
만물을 만드는 생산의 주체는 '노동자'다. 생산의 주체이자 이 땅의 다수를 이루고 있는 '노동자' 세상은
필연이다. 더불어 평등한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그 누구도 아닌 '노동자'가 투쟁의 주체이자 주인이라는
영광된 지위를 가진 것이다.
학생 신분에서 학습을 통해 인식된 '노동자'는 동경이었다. 생산의 주체, 집단의 주체로서 노동자가 가지는
규율성, 집단성, 혁명성은 인식 그 자체로서 가슴떨림과 흥분, 신비로움과 존경의 그 무엇이었다.
세상을 궁극적으로 바꾸는 주체이면서도 자신을 내세우기보다는 동료와 전체를 생각하고, 소박하고 겸손
하면서도 끈질기고 완강한 혁명적 실체로서 '노동자'였기에, 노동자가 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완벽하고
아름다운 삶을 수놓는 것으로 되었다.
밑에 친구랑 셋이서 대공원인가 어딘가 놀러 갔었는데...
안산 반월공단 '정원정밀'이라는 회사를 다닐 때 친구다. 어디서 뭘 하는지...
대학 3학년 즈음에 나는 평생을 노동자로서 살겠다는 결심과 의지를 가졌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운동권에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게 된다. 오죽하면 서울대를 예로 들어서
1학년 때는 4천여명 전체가 운동권이지만 막상 4학년 졸업을 하면서 현장(노동, 공장)으로 이전, 투신하는
인자(운동대오)는 손으로 꼽을 정도라는 씁쓸한 이야기가 흘러 다녔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흔들리고 힘들어 하는 후배들에게 나는 자신있게 말했다. "나는 결코 너희들에게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이다. 선배로서 책임지는 인생을 살겠다. 나이 50, 60이 되어서 만났을 때,
선배가 여전히 지금의 약속과 의지대로 살고 있을테니까, 혹시라도 어려움이 있었다면 선배의 삶으로
위로가 되고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렇게 나는 노동자가 되었다.
길지 않은 세월인데, 그 세월속에서 세상은 참 빠르게 변한다.
공돌이, 공순이로 불리던 '노동자'도 이제는 '귀족노동자', '비정규직'이라는 낯선 말이 일반화된지
오래되었다.
지금 학생들은 공돌이, 공순이라는 말을 알아 듣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이 줄어 들고 사라지게
된 것이 87년 7,8,9월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국에서 들불처럼 번지고 일어났던 노동조합 결성,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투쟁이었으니 그리 오래전 일이 아니다.
노동자 밀집지역에서는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노동학교, 역사교실이 성황리에 전개되었다.
노동자들과 5.18기념 시기에 광주에 갔었다.
93년, 노동학교 수련회
앞서 투쟁한 노동자, 노동조합에 함께하지 못한 노동자, 미조직사업장은 마음으로나마 감사와 연대의
손길을 보내야 한다. 어느 자본가(사장)가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을 해주고 싶어 하겠는가? 지금도
노조를 인정하지 못하는 삼성이 임금인상, 노동조건 개선을 해주고 싶어서 했겠는가? 이병철, 이건희가
자선사업가 정신이 강해서 이겠는가? 아니다. 비슷한 업종과 재벌들에서 수없이 많은 노동자가 피흘리고
감옥가고 투쟁해서 임금을 노동조건을 올려 놓았으니 삼성이 제아무리 싫어도 그와 유사하게 올려야만
했던 것이다. 더 나아가서 삼성은 노조가 없어도 된다는 걸 재직노동자에게 보여주기 위해 노조있는 곳
보다 조금이라도 더 올려주는 고육책까지 쓰고 있는 것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투쟁하는 노동자, 노동조합에 고마움과 연대의 정신을 보내기보다 비난하고 욕한다면
그 인간이 제정신이랄 수 있겠는가?
노동조합 지원 방문, 회사 문 앞에서...
나는 여전히 노동자가 아닌 길은 개인적 측면에서 거부할려는 경향이 강하다.
활동의 영역에서 보면 조금 다른 면도 있겠지만 개인적 삶의 자세영역에서 만큼은 자꾸만 좁은 영역에서
노동자의 삶을 쫓고자 하는 경향성이 여전하다.
지난 선거 이후에 굳이 다른 걸 생각하지 않고 노동현장에 들어간 것도 그렇고 지금에 택시노동자의 삶도
그렇다. 괜히 연구소니 자치회니 하면서 폼잡기가 마뜩치 않은 것이다.
노동자정치가가 아닌 다음에야 난 여전히 노동자로서 실존적 삶을 살 것이다. 물론 농민으로서 삶도
그 영역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으리라 본다.
이 삶의 대전제는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평등과 평화, 인권이 넘치는 세상이다.
이 길에 여전히 '노동자'는 중심이다.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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