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9월경에 편지 형식으로 쓴 글인데 남아 있네요. 옮겨 봅니다.
지난 글이 어디서 끝난는지 정확하지가 않네요
그 시절에 투쟁은 상당히 비밀적이고, 엄혹한 정세와 분위기 속에서 항상 이루어졌어요.
주택가 피세일(유인물배포)를 나갈때도 사전에 충분한 답사를 했으며, 양쪽에 망을 보도록하고 순식간에 유인물을 집집에 뿌렸지요. 물론 유인물 내용은 전두환독재타도와 미국의 문제 등이었지요.
소위 말하는 가투(길거리투쟁)를 나갈때도 세밀한 답사와 진행에 따른 시간 등을 정확히 체크해서 진행했으며, 동(주동자)의 호루라기소리에 갑자기 길거리에 뛰어들었으며, 플랭카드와 태극기를 앞장세우고 우리는 길을 점령하고 시위에 들어갔습니다. 그러한 시위는 통상 5분을 넘기지 못했어요. 금새 짭새들이 들이닥쳤고, 동(주동자)은 감동적으로 저항하다가 체포되어 구속되었죠. 어쩌면 적들은 그렇게도 빠르게 도착하는지... 물론 2백명내외의 시위대는 삐라를 뿌리고, 벽돌을 깨서 저항하였지만 적들의 물리력과 수에 대항할 수 없었으며, 항상 여러명이 잡혀들어가곤 했죠.
이러한 시위중에도 우리는 참 많은 학습을 했으며, 상호간에 논쟁을 참 많이 했습니다.
1학년의 경우에는 사회를 올바로 볼수 있는 기본교재로 소설이나 기본적인 철학책, 그리고 역사와 경제관련한 것들이었습니다. 그당시 읽었던 책들로 난장이가 쏘아올린 공, 소외된 삶의 뿌리를 찾아서, 광장, 철학에세이 등으로 소위 1학년들에게 새롭게 사회와 역사를 바라 볼 수 있는 시각교정용들이라 할 것입니다.
2학년은 경제, 역사, 철학 등이 조금 심도있게 진행됩니다.
3학년은 사회구성체와 유물변증법등의 심화된 학습이며, 3학년이 되면 사실 학습에 있어서 기본은 거의 마스터한다고 할 것입니다.
내 경우는 열심히 공부를 했었는데, 이를 선배들이 인정해서 2학년이 되면서 소위 RP(확대재생산)를 담당하였습니다. 즉, 1학년들을 지도하게 된 거지요. 이렇게 되면서 1주일에 9번의 세미나를 진행하곤 했습니다. 가령 자본주의의 구조와 발전이라는 책은 내가 학습한 것을 비롯해서 지도하는데 까지 9번 정도 하다보니까 나중에는 책을 달달 외우다시피 했지요. 책을 보지 않고도 후배들을 교양할 수 있을 정도였지요.
86년말 87년이 되면서 소위 학생운동권에서는 주사학습이 대중적으로 퍼져갔으며, 북한 바로알기 및 자주민주통일이라는 투쟁의 기본방침이 세워졌습니다. 나도 주체사상관련한 책들에 대해서 꽤나 깊히 공부를 했습니다. 주체사상과 관련해 많은 이야기들이 있습니다만 그러한 이야기들의 많은 부분이 아마 관련된 책 한 권 제대로 읽지 않고 하는 것일 것입니다. 지금은 얕은 기억만 남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인정하지 않으려해도 맑시즘은 현대자본주의에서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이즘이며, 사조입니다. 맑스를 모르고는 현대자본주의에 대해서 논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가 자본주의자이든, 사회주의자이든 말입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지만 주사가 가지고 있는 학문적권위와 영향력에 대해서는 통일이 되면 새롭게 조명될 것이라 봅니다. 문제는 현실에서 주사가 어떻게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현실에서 보여지는 한계가 크다고 할 것입니다.
마누라와 나는 96년 3월에 관계를 맺고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당시에 운동권에서는 연애에 대해서 조금은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특히나 선배와 후배의 연애는 금기시되던 분위기도 있었습니다.
그런 분위기로 인해서 내가 도망다니고, 구속되어 있을 때 아무도 모르게 마누라가 참 많이 마음 아퍼했습니다. 아무도 모르는 아픔을 혼자서 가져가야 했으니까요. 내가 수배되어 도망다니는 동안은 마누라를 그래도 만날수 있었는데, 구속되고 보니까 만날수가 없었어요.
당시에 정치범은 직계가족외에는 면회를 불허했습니다. 한번은 마누라가 아버지와 면회를 왔다가 무조건 들어왔는데 바로 쫓겨났어요. 그 뒷모습이 얼마나 마음 아프던지 참 아련했습니다. 마누라도 쫓겨나가면서 많이 울었다고 하더군요. 어쩌면 마누라는 애인이 감옥에 있으니까 투쟁에 더욱 열심히 했을 것입니다. 그 결과가 96년 10.28건대투쟁으로 마누라와 동생이 구속되었지요.
그 때 나는 감옥에 있었는데, 나오니까 마누라와 동생이 반대로 감옥에 있더군요. 당시에 처갓댁에서는 나와 마누라관계를 알지도 못했지만 나중에 짭새를 통해서 알고는 결코 인정할수 없다는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아무런 도움도 없이 마누라가 나오기만 기다릴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누라가 나오는 날 서울구치소에 갔다가 처갓댁식구와 같이 가는 마누라 뒷모습만 보고 돌아서야 하는 내모습이 서글프기도 했습니다.
동생과 마누라는 구속되면서 빨갱이로 몰리는 여론으로 인하여 참 많이도 맞고 터졌다고 하더군요. 마누라는 겨울이어서 손발동상에다 얼굴에도 동상이 있어서 출감한 뒤에도 한동안 약을 매년 열심히 발라야만 했어요. 엄마가 약사서 열심히 마누라를 발라 주었습니다.
우리 마누라는 약해 보이는데, 상당한 강단을 가졌어요. 그러니까 적들이 보기에 독종일수 있는 사람이지요. 당시에 주변에 평가가 적들이 고문을 해도 끝까지 버틸수 있는 사람으로 마누라를 평하곤 했으니까요. 우리 사랑은 마누라가 출감하면서 한단계 다른 상황에서 계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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