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룩
여자는 남편 생일 축하를 위해 맛나는 음식을 준비한다. 남편회사 직원들에게도 연락해서 남편 몰래 방문 해 줄 것을 부탁한다. 깜짝 놀라고 좋아할 남편을 생각하며 여자는 시장도 보고, 예쁜 드레스도 입었다.
여자는 아이가 죽은 후로부터 남편 휴대폰 번호, 계좌번호, 현관 비밀번호, 집 전화번호, 메일 비번이 잘 떠오르지 않는다. 여자는 약을 먹고 바르는 이상한 행동에서 이렇게 약을 먹었으면 아이가 죽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도 한다. 여자는 자꾸만 얼룩이 보인다. 시계처럼 규칙적으로 돌아가는 남편의 모습에서 여자는 얼룩이 좀 있으면 어떨까 싶다.
생일축하가 끝나고 남편은 여자에게 역정을 낸다. 남편 생일이 아니라 아이가 죽은 날이었다. 시계처럼 규칙적이던 남편은 다음날 회사에도 가지 않고 인터넷을 한참 살피더니 여자에게 외출하자고 한다. 찾아간 곳은 정신과병원이었다.
화장실에서 헛구역질을 해대던 여자는 남편을 따돌리고 약국으로 들어간다. 약을 산 여자는 물과 함께 약을 먹는다. 도심에 나선 여자는 어지럽다. 여자는 자신에게 지금 무엇이 남았는지 알 수 없다. 시계 밥을 주기 위해 살아온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자는 시계와 시간으로부터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여자는 지하철을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을 갔다. 있는 돈 이만칠천원을 몽땅 내밀고 그 돈만큼 갈 수 있는 표를 달라고 한다. 만칠천원에 갈 수 있는 곳이 가장 먼 곳이다. 여자는 버스를 타고 간다. 잠든 사이에 낯선 남자가 어깨를 만지고 성기를 내놓고 있다. 여자는 놀랐지만 우스웠다. 여자는 사내의 성기를 가볍게 흔들어 주었다. 여자는 생각했다. ‘넘어지지 않으려면 이보다 못한 버스 손잡이라도 잡는데’
버스손잡이나 지푸라기보다 못한 게 남자들의 성기라고 생각한다. 남편 앞에서 사랑 때문에 다리를 벌렸다고 생각했던 것도 우습다.
여자는 새벽 두 시를 넘긴 시각에 작은 시골마을에 내렸다. 구천원 정도에 갈 수 있는 곳으로 택시기사에게 데려다 달라고 한다. 기사는 ‘울란바토르’라는 카페민박에 데려다 준다. 책을 읽고 있던 주인장에게 여자는 묻는다. “여자······, 필요하나요?” “그럼 혹시 요리사는 필요하나요?” 맥주 한 잔을 남자에게 외상으로 달라고 하고, 남자가 맥주를 가지고 오는데 그 모습이 진짜가 아니라 얼룩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데서 소설은 끝난다.
더러움, 불규칙이 없는 남편에게 시계추처럼 살아온 여자. 얼룩이 없는 남자의 아내로 살아온 여자. 아이가 죽은 다음날부터 날짜와 요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여자. 어쩌면 껌처럼 남편과 가정이라는 울타리에 붙어서 아무런 고민 없이 살아온 여자의 삶이 아이가 죽고서 다른 변화와 환경에 놓이게 된다. 사십 년이 넘어서야 그동안 지켜왔던 시간과 시계와 그것으로부터의 탈출을 감행한 여자.
어디 여자만 얼룩에 종속되었으랴? 나이 먹고 늙어도 아무런 생각 없이 살아가기는 마찬가지의 세월을 사는 세상이 지금 여기는 아닐까?
박성원
- 1969년 대구 출생
- 1994년 문학과 사회 등단
- 소설집 나를 훔쳐라, 우리는 달려간다, 도시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異常 李箱 理想 등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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